咨詢아사쿠사 히사고도오리 상점가협동조합

 

상점가 소개

아사쿠사 히사고도리의 "유서"와 연혁

凌雲閣
표주박 연못(효탄이케)에서 료운각을 바라보다

아사쿠사 히사고도리 상점가협동조합(통칭 히사고도리 상점가)는 아사쿠사 북서부에 위치한 6구로부터 고토토이도리에 이르는 남북으로 약180미터의 길가 양편에 대략  50점포가 줄지어 늘어선 상점가입니다.
옛날에는 아사쿠사절부터 요시와라 유곽으로 통하는 길로서, 또한 간토 대지진 재해 전에는 료운각(일반적으로 12층) 아래의 "요네큐도리"로서 크게 번영했습니다. 다이쇼 13년에 이루어졌던 구역정리 후 길가 상점들의 자기자본으로 한 도로정포을 계기로 다이쇼 13년 봄 지금은 없는 아사쿠사공원 효탄이케(표주박 연못)와의 인연으로 "효탄도리 "로 명명 상점회로서 그 걸음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쇼와16년까지 센조크 도리와 연합회를 조직해 활동을 계속했고, 제2차 대전시에 황폐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후 쇼와21년 전화 전신주의 복구(자기부담)를 비롯한 가로등의 설치·일부적립저축 제도를 창설하는 등 신속하게 전후 복구에 착수하여 쇼와28년에는 장기적 발전을 위한 협동 조합을 조직했습니다.
초대 타케인리사부로씨, 제2대 사이토토키요시씨, 제3대 타나카쇼타로씨, 제4대 스즈키류스케씨의 각 이사장으로부터 시작된 역대 이사님들의 지혜와 행동력을 결집하고 조합원의 막강한 협력을 얻어 각종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쇼와30년에는 도쿄도 정식 허가 제1호 철골전면개폐식 아케이드를 공사비 1200만엔을 들여 건설하고(전국적 보급을 이끌게 된) 그 후에도 철골3층 조합 사무소의 건설·통일 간판의 설치, 전면컬러 포장화 등의 환경 정비 사업, 각종 판매 및 계절별 장식, 가두 방송 등의 판매촉진사업, 아케이드, 조명설비 등의 개수・개장의 시설 유지관리사업,  조합원에 대한 복리후생 사업 등. 상가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협동조합화하여 40년 남짓, 스즈키 이사장 시절(쇼와58년)에 21세기를 향해 상기되고 제5대 야마모토카이지 이사장을 선두로 강력히 추진된 [이키(멋)]를 공통 컨셉으로 한 "에도구상"은 멋지게 실현되고 현시대에 계승되고 있습니다. 이는 상가 활성화 차원에서 아사쿠사 지역 특성을 살린 개성 강한 광역형 상점가로의 탈피사업이며, 그 첫 걸음으로서 헤세이4년 아케이드 컬러 포장의 전면개장을 이루어내 (도쿄도 지사로부터 [풍부하고 정감있는 길 만들기에 공헌했다.]하여 다이토구 최초의 감사장을 수여했습니다) 그 해 10월에는 [아사쿠사 효탄제]라 칭하는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했습니다. 그 후 [아사쿠사 히사고도리 여름 페스티벌] [아사쿠사 히사고도리 감사제]로 이름을 바꾸어 상점가의 정기적 이벤트로 정착되었습니다.

 


 

효탄이케(표주박 연못)란

아사쿠사6구의 바로 동쪽에 [효탄이케]라는 큰 연못이 있었습니다. 현재 하나야시키(꽃 정원)의 전방, JRA의 장외 마권(경마권)매장・윈즈아사쿠사를 포함한 일대가 연못이였던 곳으로 정식 이름은 오오이케(큰 연못)였지만 연못 형태로부터 통칭[표주박 연못]으로 명명되어 불려지고 있었습니다”
메이지6년, 아사쿠사절 경내는 다죠관행정명령에 따라 아사쿠사 공원이 되었고 제1 구로부터 6개 권역으로 나누어졌습니다. 6구에는 아사쿠사데라(절) 오쿠야마의 구경거리들이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6구는 아사쿠사 논밭에 이어지는  습지대였으므로 근처에 연못을 파고, 판 흙으로 흥행거리(볼거리)를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메이지18년) 연못 중앙의 섬이 쌓아 올려지고, 다리가 놓여져 등나무 덩굴이 만들어졌습니다. 개화때에는 많은 꽃놀이꾼이 몰려들었지요. 같은해 23년 근처에 료운각이라 하여 이른바 12층이 건설되면 수면에 그 모습이 비쳤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훌륭하여 아사쿠사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관동 대지진으로 인해 잔해 등이 연못 주위에 쌓이거나 불법 점거자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주변  환경이 악화되었습니다. 그런 때의 쇼와25년, 도쿄도로부터 원래의 경내지가 센소지(절)에 반환되었습니다. 당시는 센소지가 전쟁피해로 소실된 본당의 재건축비용 마련에 여념이 없던 때였기 때문에 연못을 매립후 매각하여 본당 재건비용을 충당하게 되었습니다. 매립 반대 운동도 일어났는데 쇼와26년 효탄이케는 마침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탄생한 지 66년후의 일이었습니다.